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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유(思惟)의 방

[스웨덴, 사유(思惟)의 방] 채식을 지향하는 삶

Lotusblomma 2020. 9. 25. 07:55

스웨덴 룬드 시에 있는 유명한 채식 식당 고빈다스(Govindas)에서의 식사 (출처: 글쓴이 본인)

 

스웨덴에서 지낸지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등의 여러 변화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몇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만한 외적인 변화와 더불어, 지난 시간 동안 내적인 성장과 변화도 많이 이루었다. 꾸밈 노동과 다이어트 강박을 버리고 진짜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시작했고, 홀로 타국에서 지내며 이방인으로서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라고 쓰고 생존 본능이라고 부른다...)도 키웠고,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며 편안한 삶을 누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마음 가짐을 가지고 살아야하는지도 깨달았다. 단 몇 마디의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그런 변화들. 이러한 변화에 더불어,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나의 식탁이 장기적으로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리고 점진적으로 완전 채식(이하 '비건')을 지향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웨덴에 와서 공부한 석사 프로그램이 환경과 생태에 대한 학문이기도 하고, 주변에 채식을 하는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많기도 하고, 이곳은 어느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방문하거나 채식 메뉴가 항상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가지의 이유와 계기가 있지만, 내가 채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9월의 어느 날. 

이제 막 석사 프로그램을 시작해서 잔뜩 부푼 마음과 큰 걱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당시,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교수님이 댁으로 애기 석사생들을 초대해서 편안한(...?) 상태로 세미나를 진행하셨다. 장장 두 시간 정도의 세미나가 끝난 후, 저녁을 먹으러 다같이 한 식당으로 갔다. 중동 지역 요리를 하는 식당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음식이라 메뉴 선정에 큰 애를 먹었다. 주변 친구들은 메뉴판에 있는 음식들에 익숙한 듯 보였고, 자연스럽게 팔라펠(falafel)과 후무스(hummus)를 주문했는데... 머리털 나고 팔라펠과 후무스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그나마 익숙해 보이는 메뉴를 주문했다. 그건 바로 '양갈비'. 다른 친구들과 다른 메뉴를 주문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리만큼 내 음식이 너무나도 늦게 나왔다. 친구들이 거의 식사를 끝나갈 때쯤? 배고파하는 나를 긍휼이 여긴(...) 친구들은 자신들의 음식을 베풀었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같은 석사 프로그램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대부분 베지테리언(vegetarian)이거나 비건(vegan)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나는 채식을 하는 친구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양갈비를 먹어야만 했다. 그 때 당시 느꼈던 감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데, 치욕스러움, 수치스러움, 민망함, 부끄러움, 당황함 등의 온갖 감정을 느끼며 마치 내가 야만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국 나는 음식을 다 먹지 못했고, 심지어 체를 해서 한동안 고생을 꽤나 했었다. 사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수치스러워야만 했었나?' 싶지만, 그 때 당시에는 정말 생소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단 한 번도, 내가 무엇인가를 먹을 때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거나 야만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육류를 섭취하는 게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기후 변화와 환경, 그리고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스웨덴까지 왔지만, 나는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나의 식탁이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환경에 의식을 가지고 (environmentally conscious) 사는 것이란,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사랑스러운 동물들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는 것 뿐이었기도 했다. 어쨌든, 무지했던 나에게 이 충격적인 경험은 앞으로 채식을 지향하는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매를 맞았다고 해야하나.

 

채식은 이렇게 극단적인(?) 경험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나의 삶으로 스며 들어왔다. 마트에 장을 보러가면, 예전에는 항상 둘러보곤 했던 육류 코너를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냥 지나치고, 버터를 제외한 유제품도 아몬드나 귀리 우유로 만들어진 제품을 더 선호하고, 해산물 같은 경우는.... 연어를 제외하고 한국에 비하면 정말 먹을 만한 게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가끔 냉동 연어를 구입해서 먹기는 하지만, 매일같이 먹지는 않으며 평소에는 채식을 하다가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 번 정도 섭취한다. 이렇게 채식을 지향하며 자연스럽게 육류 소비는 현저하게 줄었고, 육류가 주를 이루는 음식을 보았을 때 '빨리 먹고 싶다'거나 '와, 고기를 정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육류 소비를 끊은 건 아니고, 적은 수이지만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한국 음식을 해 먹을 때, 그리고 특정 한국 음식이 너무나도 그리울 때는 가끔 육류를 섭취할 때가 있다. 육류가 딱히 그립다거나 그 맛이 좋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음식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고자 할 때, 그 때 아주 가끔 육류를 소비하는 것이다. 육류를 넣지 않아도 완성시킬 수 있는 한국 음식의 경우 - 예를 들면, 잡채, 떡볶이, 잔치국수, 비빔국수 등 - 에는 아예 육류를 넣지 않으며, 육류가 주가 되거나 다른 식재료로 대체할 수 없는 음식, 예를 들자면 삼계탕과 갈비찜 같은 음식에만 육류를 넣는다. 이런 식으로, 나는 점차 보통의 날들에는 육류 섭취를 하지 않고, 특별한 경우에만 아주 가끔 육류가 들어간 한국 음식을 먹으며 점진적으로 채식을 하는 삶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래는 그 동안 대부분 직접 요리한 채식 밥상의 사진들이다. 사진첩에 있는 모든 채식 밥상 사진을 올릴 수는 없어서(...) 올해 찍은 사진들만 올려 본다. 채식 밥상이 얼마나 보기에도 화려하고 맛도 있게요? 채식하면 풀떼기(?)만 먹고 어떻게 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채식의 전부는 아니랍니다.

 

비건 볶음 우동과 비건 비빔밥.
팔라펠과 채식 부페.
비건 버섯 리조또와 잡채.
버섯 크림 스프와 나의 영혼의 단짝 비건 버섯 토마토 오일 파스타.
비거니즘(veganism)을 실천한 지 몇 년 된 친구와 함께 만들고 맛있게 먹은 비건 '미트볼'과 스콘.
린셰핑 시에 위치한 베스타드 버거(Bastard Burgers)에는 모든 메뉴에 비건 옵션이 있다. 사진 속 버거 역시 비건이다.
독일의 한인마트에서 주문한 소면을 받아 신나는 마음으로 만들었던 비건 잔치국수와 베지테리언 비빔국수.
왼쪽은 아마도(?) 여러 야채 고명을 올린 비빔면, 오른쪽은 베지테리언 야채 카레.

 

완전한 비건이 되는 길은 아직 멀었지만, 지금까지 서서히 조금씩 식탁 위의 메뉴를 전환해 온 나에게 사랑을 듬뿍 보낸다. 예전에는 베지테리언이나 비건 옵션의 음식을 먹으면, '아니, 고기가 없는데 이렇게 맛이 있을 수가 있다고?'라는 생각을 먼저 했지만, 지금은 자연스레 채식 식단을 구성하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각각의 식재료가 주는 풍미와 색깔, 그리고 다른 재료와 잘 어우러진 맛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예전에는 매일같이 음식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그랬는데, 채식을 적극적으로 시작한 이후부터는 소화도 정말 잘 되고 속도 편하다. 좋은 식재료로 맛있고 즐거운 식사를 즐기고, 운동도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삶을 사니 몸이 아플 날도 없다. 이렇듯, 나 개인에게 정말로 유익한 채식이지만, 역시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 세대가 마땅히, 그리고 감사하게 누려야 할 미래를 위해서라도 채식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한 사람이 변해봤자, 얼마나 큰 변화가 있겠어'라고 생각하기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채식에 관심을 가지고 육류 섭취를 서서히 줄여나가는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깊게 고민해보고 직접 실천해보는 것. 이렇게 한 단계씩 지나며 자연스럽게 채식을 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지속가능한 전환(sustainability transformation)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쉽고도 나와 가장 가까운 방법이 아닐까?